[자책하지마 14화] 손이 느려도 괜찮아 — 말로 메모하고 알람 맞추기

손이 느려진 만큼, 잊는 것도 빨라졌다. 가스 불 끄는 걸 깜빡하고, 약 먹을 시간을 놓치고, 좋은 생각은 적기도 전에 사라진다. 글자 치는 건 느리고, 받아 적자니 답답하다. 메모지는 늘 손이 닿지 않는 데 있다. 냉장고에 붙은 부모의 삐뚤빼뚤한 메모를 기억하는 자식이 있을 것이다. 화면한테 말로 시켜봤다. “오후 세 시에 약 먹으라고 알람 맞춰줘.” “장 볼 … 더 읽기

[자책하지마 13화] 이게 뭐였더라 — 사진으로 물건·꽃 찾기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것들이, 자꾸 늘어간다. 길가에 핀 꽃, 손주가 사달라던 장난감, 어디서 본 듯한 약통. 분명 아는데 이름이 입가에서만 맴돈다. 나이 탓인가 싶어 쓸쓸했다. 말끝이 자주 흐려지는 부모를 보며 가슴 한쪽이 내려앉아본 자식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사진을 찍어 화면에 물었다. “이거 무슨 꽃이야?” “이 장난감 이름이랑 어디서 파는지 알려줘.” 이름이 돌아오고, 살 곳까지 … 더 읽기

[자책하지마 12화] 영상통화로 손주 얼굴 보기 — “할머니, 나 보여?”

목소리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이 있다. 멀리 사는 손주. 전화로 “밥 먹었니” 묻는 게 다였다. 얼굴 보고 싶다는 말은 어쩐지 늙은 욕심 같아 삼켰다. 자식이 “영상통화 하면 되잖아” 해도, 그 버튼 하나가 또 어렵다. 잘못 누를까, 얼굴이 이상하게 나올까. 보고 싶다는 말을 삼켜본 적 있는 부모의 마음을, 자식은 한참 뒤에야 안다. 화면한테 물었다. “손주랑 영상통화 거는 … 더 읽기

[자책하지마 11화] 무인 발권기 앞에서 — 기차표 한 장의 용기

명절이 다가오면, 나는 기차표보다 발권기가 더 무섭다. 역에 일찍 나갔다. 창구는 줄이 길고, 무인 발권기는 비어 있다. 비어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 나 같은 사람한텐. 출발역, 도착역, 날짜, 좌석… 화면이 묻는 게 많아 손이 자꾸 멈춘다. 뒤에 젊은 사람이 서면, 괜히 표를 못 끊고 비켜준 적도 있다. 역 한구석에서 발권기를 한참 들여다보던 노인을 … 더 읽기

[다시 살아보겠어 10화] 빛은 가장 낮은 곳에서 온다

반쪽짜리 형광등을 드디어 갈았다. 새 등을 끼우고 스위치를 올리자, 방이 환해졌다. 어둠에 익숙했던 눈이 잠깐 시렸다. 나는 그 환한 방 한가운데 서서, 오래 울었다. 슬퍼서가 아니라, 너무 오랜만에 밝아서. 언젠가 어디선가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우리가 버리는 가장 천한 것들 — 하수구로 흘려보낸 그 더러운 것들이, 도시의 가장 깊은 곳을 지나며 분해되고 정화되어, 끝내 … 더 읽기

[다시 살아보겠어 9화] 나는 다시 배우기로 했다

매달 정해진 날, 정해진 금액을 갚기 시작했다. 액수는 작았지만, 통장에 처음으로 ‘계획’이라는 게 생겼다. 낮의 시간을 어떻게 쓸지가 문제였다. 빈 시간은 늘 나를 다시 화면 앞으로 데려갔으니까. 그래서 나는 다시 배우기로 했다. 고용센터에서 국민취업지원제도를 신청했다. 취업을 준비하는 동안 약간의 수당을 받으며 상담을 받을 수 있었고, 국민내일배움카드로는 배우고 싶던 기술의 수강료를 지원받았다. (고용24, work24.go.kr) 새 기술을 … 더 읽기

[다시 살아보겠어 8화] 도움은 생각보다 많았다

한 통의 전화가 길을 열자, 길은 여러 갈래로 이어졌다. 상담사는 내 빚이 갚을 수 있는 수준을 넘었다는 걸 보고, 법원의 개인회생을 권했다. 소득에서 최소 생계비를 빼고 보통 3년 동안 정해진 만큼 갚으면, 남은 빚은 면책되는 제도. 변호사 비용이 걱정이라고 하자, 대한법률구조공단(국번 없이 132)에서 무료로 도와준다고 알려줬다. 정말이었다. 나는 거기서 서류를 챙겨 회생을 신청했다. 당장의 생계도 … 더 읽기

[자책하지마 10화] 이제 뭐든 “일단 물어보면 돼요” — 그리고 다음 이야기

처음 그날, 키오스크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졌었다. 그게 불과 얼마 전이다. 아메리카노 한 잔 앞에서 식은땀을 흘리던 나. 그 뒤로 나는 키오스크를 미리 연습하고, 안내문을 사진으로 풀고, 사기 문자를 가려내고, 약 봉투를 읽고, 메뉴를 옮기고, 약관을 줄이고, 가계부까지 시작했다. 돌아보면 대단한 걸 배운 게 아니다. 그저 ‘모르면 물어본다’, 그 한 가지를 손에 쥐었을 뿐이다. 예순다섯. … 더 읽기

[다시 살아보겠어 7화]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걸기까지 사흘이 걸렸다. 번호는 진작 적어 두었다. 신용회복위원회 1600-5500. 서민금융 통합상담 1397. 그 열 자리를 누르는 게 그렇게 어려웠다. 누르면 내 한심함이 다 들통날 것 같았다. 모르는 상담사 앞에서 “제가 이렇게 됐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을 상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흘째 되던 낮, 나는 눈을 질끈 감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길게 울렸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때 … 더 읽기

[자책하지마 9화] 영수증·메모로 가계부, 부담 없이 시작하기

돈은 늘,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사라진다. 연금으로 꾸리는 살림, 한 푼이 아쉽다. 가계부를 써보겠다고 공책을 샀다가, 사흘 만에 덮었다. 한 줄 한 줄 적는 일이 그렇게 고될 줄이야. 영수증은 지갑 속에서 구겨진 채, 쌓이기만 했다. 어머니의 손때 묻은 가계부 한 권을 기억하는 자식이라면, 이 마음을 알 것이다. 거창하게 말고, 아주 작게 시작했다. 영수증을 사진 찍어 … 더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