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살아보겠어 10화] 빛은 가장 낮은 곳에서 온다

반쪽짜리 형광등을 드디어 갈았다. 새 등을 끼우고 스위치를 올리자, 방이 환해졌다. 어둠에 익숙했던 눈이 잠깐 시렸다. 나는 그 환한 방 한가운데 서서, 오래 울었다. 슬퍼서가 아니라, 너무 오랜만에 밝아서. 언젠가 어디선가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우리가 버리는 가장 천한 것들 — 하수구로 흘려보낸 그 더러운 것들이, 도시의 가장 깊은 곳을 지나며 분해되고 정화되어, 끝내 … 더 읽기

[다시 살아보겠어 9화] 나는 다시 배우기로 했다

매달 정해진 날, 정해진 금액을 갚기 시작했다. 액수는 작았지만, 통장에 처음으로 ‘계획’이라는 게 생겼다. 낮의 시간을 어떻게 쓸지가 문제였다. 빈 시간은 늘 나를 다시 화면 앞으로 데려갔으니까. 그래서 나는 다시 배우기로 했다. 고용센터에서 국민취업지원제도를 신청했다. 취업을 준비하는 동안 약간의 수당을 받으며 상담을 받을 수 있었고, 국민내일배움카드로는 배우고 싶던 기술의 수강료를 지원받았다. (고용24, work24.go.kr) 새 기술을 … 더 읽기

[다시 살아보겠어 8화] 도움은 생각보다 많았다

한 통의 전화가 길을 열자, 길은 여러 갈래로 이어졌다. 상담사는 내 빚이 갚을 수 있는 수준을 넘었다는 걸 보고, 법원의 개인회생을 권했다. 소득에서 최소 생계비를 빼고 보통 3년 동안 정해진 만큼 갚으면, 남은 빚은 면책되는 제도. 변호사 비용이 걱정이라고 하자, 대한법률구조공단(국번 없이 132)에서 무료로 도와준다고 알려줬다. 정말이었다. 나는 거기서 서류를 챙겨 회생을 신청했다. 당장의 생계도 … 더 읽기

[자책하지마 10화] 이제 뭐든 “일단 물어보면 돼요” — 그리고 다음 이야기

처음 그날, 키오스크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졌었다. 그게 불과 얼마 전이다. 아메리카노 한 잔 앞에서 식은땀을 흘리던 나. 그 뒤로 나는 키오스크를 미리 연습하고, 안내문을 사진으로 풀고, 사기 문자를 가려내고, 약 봉투를 읽고, 메뉴를 옮기고, 약관을 줄이고, 가계부까지 시작했다. 돌아보면 대단한 걸 배운 게 아니다. 그저 ‘모르면 물어본다’, 그 한 가지를 손에 쥐었을 뿐이다. 예순다섯. … 더 읽기

[다시 살아보겠어 7화]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걸기까지 사흘이 걸렸다. 번호는 진작 적어 두었다. 신용회복위원회 1600-5500. 서민금융 통합상담 1397. 그 열 자리를 누르는 게 그렇게 어려웠다. 누르면 내 한심함이 다 들통날 것 같았다. 모르는 상담사 앞에서 “제가 이렇게 됐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을 상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흘째 되던 낮, 나는 눈을 질끈 감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길게 울렸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때 … 더 읽기

[자책하지마 9화] 영수증·메모로 가계부, 부담 없이 시작하기

돈은 늘,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사라진다. 연금으로 꾸리는 살림, 한 푼이 아쉽다. 가계부를 써보겠다고 공책을 샀다가, 사흘 만에 덮었다. 한 줄 한 줄 적는 일이 그렇게 고될 줄이야. 영수증은 지갑 속에서 구겨진 채, 쌓이기만 했다. 어머니의 손때 묻은 가계부 한 권을 기억하는 자식이라면, 이 마음을 알 것이다. 거창하게 말고, 아주 작게 시작했다. 영수증을 사진 찍어 … 더 읽기

[다시 살아보겠어 6화] 나보다 더한 사람이 웃고 있었다

검색창에 친 한 문장 끝에서, 나는 우연히 한 사람의 기록을 만났다. 블로그였는지 영상이었는지는 흐릿하다. 다만 그 사람의 사정이 나보다 한참 더 깊었다는 건 또렷하다. 빚은 나보다 몇 배였고, 한때는 길에서 잤다고 했다. 가족과도 끊겼다고 했다. 나는 솔직히, 처음엔 안도했던 것 같다. 나보다 더한 사람도 있구나, 하는 못된 안도. 그런데 그 사람은 지금, 웃고 있었다. 화려하게가 … 더 읽기

[자책하지마 8화] 긴 글·약관이 무서울 때 — 한 줄로 줄이는 법

긴 글은, 시작도 전에 사람을 지치게 한다. 보험 안내서, 휴대폰 약정서, ‘동의하십니까’ 아래 깨알같이 박힌 약관 수십 장. 다 읽자니 끝이 없고, 안 읽고 누르자니 어딘가 손해 볼 것만 같다. 그동안 나는 그저 눈을 질끈 감고 ‘동의’를 눌러왔다. 무얼 약속하는지도 모른 채, 늘 조금씩 지는 기분으로. 작은 글씨 앞에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도장을 찍던 부모의 … 더 읽기

[다시 살아보겠어 5화] 전화가 울려도 받지 않았다

통장이 압류됐다는 문자를 받은 날, 나는 회사에 병가를 냈다. 그리고 다시 출근하지 않았다. 신용불량. 정확히는 금융채무 불이행자. 서류상의 그 이름표가 붙은 뒤로, 나는 사람을 피했다. 친구의 연락도, 엄마의 전화도, 다 무서웠다. 내 형편이 들킬까 봐. 한심하다는 말을 들을까 봐. 나는 커튼을 치고, 낮에도 불을 끄고, 배달 음식 봉지만 늘어가는 방에 나를 가뒀다. 은둔이라는 말은 거창하다. … 더 읽기

[자책하지마 7화] 외국 메뉴·외국어, 사진 한 장이면 끝

세상은 넓어졌는데, 나는 글자 앞에서 자꾸 멈춰 선다. 손주가 데려간 식당, 메뉴판이 온통 영어다. 파스타 이름은 어쩌면 그리 긴지. 손주 앞에서 “아무거나” 하기도 멋쩍어, 나는 메뉴판을 든 채 괜히 안경만 고쳐 썼다. 외국 약통, 수입 과자 봉지, 가끔 날아드는 영어 안내문 — 다 그랬다. 읽고 싶은데 못 읽는 답답함은, 생각보다 사람을 외롭게 한다. 글자 앞에서 … 더 읽기